비그포르스 복지국가과 잠정적 유토피아
작가 홍기빈
출판 책세상
문화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점점 퇴락한 존재가 되어가면서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된다. 노동자들이 이러한 상태에 빠져들면 사회는 이들의 정신적, 물질적 상태를 개선해 이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회복시키려 들기는 커녕, 오히려 이를 빌미로 노동자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차별하고 멸시하는 문화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고 고정시키는 유형무형의 사회 제도와 위계 구조를 만들어낸다.
결국 노동자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더욱더 힘겨운 상태에 빠지고 이 때문에 조화로운 공동체의 이상은 더욱더 멀어지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비그포르스는 이렇게 20세기 사회민주주의의 역사 속에서 정치 운동과 경제제도 및 정책 양쪽에 걸쳐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를 모두 넘어서는 대안적 틀의 가능성을 제시한 인물이다. 20년 전에 공산주의의 몰락을 목격하고 지금 다시 지구적 금융 자본주의의 위기를 목역하고 있는 21세기의 우리에게도,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맹신을 극복하고 사회를 실질적으로 개선하고 바꿔나갈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정치 경제 사상 및 이론과 실천을 창출하는 것은 여전히 중대한 과제로 남아 있다.
생디칼리슴은 전세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써 스스로를 조직화해 산업을 운영하는 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 현존하는 국가와 자본가들을 일소해버리는 혁명적 행동을 통해서만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17년 동안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그가 한 편지에서 "일생을 재무부 장관으로 사는 것은 정말 상상만 해도 공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그리고 문화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점점 퇴락한 존재가 되어가면서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된다.
'사회 내의 인적, 물적 자원을 산업으로 조직하는 데 있어서 과연 자본주의는 효율적인가"
비그포르스가 말하는 '잠정적 유토피아' 또한 사람들이 현실의 잘못을 인식하고 그것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능력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그것을 더욱 적극적이고 명확한 생각과 행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길잡이'이다.
'자본, 원자재, 놀고 있는 노동자 등 생산에 필요한 것은 다 있다. 그런데 이 노동자들에게 원자재와 자본을 생산적으로 활용하여 유용한 생산물을 만들도록 일을 시킬 방법은 없다' 어떤 사회가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면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우리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경기가 제일 좋아봐야 10퍼센트에 육박하는 노동자들이 실업에 시달려야 하며 상황이 나빠지면 실업률이 더 올라가는 이런 따위의 체제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제아무리 많은 전문가들이 온갖 이론으로 무장하고나 그게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비그포르스
<돈이 없어서 일도 못할 지경이라고?>
1932년 사민당 비그포르스의 팸플릿, 스웨덴 정치사, 아니 현대의 세계 정치사에서 성공한 선거 팸플릿의 고전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이제 그렇게 확장된 노동자들의 역량과 힘을 발판 삼아 펴등의 정신이 더욱 깊이 실현된 사회를 꿈꾸고 또 그러한 사회를 향해 새로이 도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펨펠T.J.Pempel이 지적했듯이 당시 일본 자본주의는 '복지 없는 코퍼러티즘'에 가까웠으며, 정치적으로 노동자 정당은 하위 파트너의 위치를 면치 못했고, 노동 운동 또한 기업별 노동조합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기업 경영에 있어서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에 있어서나 스웨덴의 LO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를 위시한 6대 기업 집단이 형성되고 운영된 형태를 보면 여러모로 비그포르스의 '소유주 없는 사회적 기업'구사과 비슷하다.
메이드네르 등이 제시한 이 최초의 구상에서 중요한 목표는 노동자들이 얻는 분배의 몫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자본 측의 지나친 사회적 권력 비대화를 막고 이를 노동 측이 견제하는 것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요컨대 이 구상은 소득의 재분배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의 재분배를 목표로 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 초에 오면 대기업의 초과 이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자유당 또한 중요하게 다루게 되는데, 이에 대해 자유당이 내놓은 안은 많은 액수를 노동자들에게 하나의 성과급으로 재분배하자는 것이었다.
비그포르스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사회 변화의 대부분은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회의 변화는 투쟁을 필요로 합니다. 사회의 변화는 싸움을 필요로 합니다. 비그포르스는 싸움을 회피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비그포르스는 결코 주저함 ㅇ벗이 사회가 계속 변화해나가도록 승리를 얻을 때까지 꿋꿋이 버티며 싸운 이였습니다.
의지의 확실성이 바로 당위이며 사유의 확실성이 바로 진리이다.
-베르트란도 스파벤타
우리는 몇십 년, 몇백 년 후에나 찾아올 낙원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낙원이란 인류 역사의 시작에도 없었고 마지막에도 없을 것이다.
-비그포르스
우리는 이 대학 저 학과에 들어가면 30년 후에 내 삶이 어떻게 될지를 완벽하게 알고 난 뒤 대학 진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역사와 인간 사회의 운동 법칙을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만 사회를 바꿔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런저런 행동을 했을 때 각각 어떤 결과들이 오게 되는지를 완벽하게 예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제 많은 사회가 아니라면, 그 문제들이 해소되고 개선된 사회라면 그 사회는 어떤 모습일지 머릿속에 대략 그릴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사회를 바꿔나가는 작업에 착수할 수 있다. 그렇게 그려낸 사회는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유토피아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그런 '아무 데도 없는 곳u-topia'은 아니다.
인도의 새댁태워죽이기 bride burning 라는 악습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새로 집안에 들어온 며느리에게 지참금을 더 뜯어내려는 시집에서는 새댁에게 온갖 박해와 생명의 위협을 가하며 돈을 요구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새댁이 부엌에서 일하는 사이에 온 가족이 부엌에 불을 지르고 집 밖으로 빠져나가 새댁을 태워 죽인다. ....중략.....늙은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된 어린 아내를 강제로 불태워 죽이는 '사티'라는 관습은 오래전인 1829년에 폐지되었지만, 새댁 태워죽이기는 되레 최근들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우리의 마음속에 모든 인간에 대한 존중이나 여성의 해방이라는 가치와 이념이 담겨 있지 않다면, 수많은 새댁이 시커먼 숯덩이가 되어 죽어나간다 해도 아무도 이를 모순이나 부조리로 느끼지 않을 것이며 이 관습은 몇백 년, 몇천 년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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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9일에 읽은 모양인데... 감상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네.
일단 메모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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