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적이

남편이 읽어준 시 모음(21.3.18.)

메이메이 2021. 5. 8. 20:44

 

뼈아픈 후회

황지우 / 시인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러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그 방을 생각하며- 김수영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 김수영

 

 

 

더운 날

적이란 해면海綿 같다

나의 양심과 독기를 빨아먹는

문어발같다

 

흡반 같은 나의 대문의 명패보다도

정체 없는 놈

더운 날

눈이 꺼지듯 적이 꺼진다

金海東 —그놈은 항상 약삭빠른 놈이지만 언제나

부하를 사랑했다

鄭炳一 — 그놈은 내심과 정반대되는 행동만을

해왔고, 그것은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였다

더운 날

적을 운산運算하고 있으면

아무 데에도 적은 없고

 

시금치 밭에 앉는 흑나비와 주황나비 모양으로

나의 과거와 미래가 숨바꼭질만 한다

「적이 어디에 있는냐?」

「적은 꼭 있어야 하느냐?」

 

순사와 땅주인에서부터 과속을 법하는 운저수에 까지

나의 적은 아직도 늘비하지만

어제의 적은 없고

더운 날처럼 어제의 적은 없고

더워진 날처럼 어제의 적은 없고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빈집-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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