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강준만출판인물과사상사발매2010.03.12
미국을 좋아하지 않아서 미국사에 관심도 없었는데
역시
1권을 읽었을 뿐인데 읽을 필요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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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이후 인쇄물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급속한 성장은 구두사회의 전통을 무너뜨렸고 서구사회의 시간을 중심으로 구성된 조직을 공간 중심의 조직으로 바꾸어놓았으며, 종교를 바꾸어 놓았고,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 활동의 많은 부분을 개인화했으며, 가치의 비교를 초래했고, 권위의 주체를 교회에서 국가로 이전시켰으며, 강력한 민족주의를 조성시켰다."
<세일럼의 마녀재판>
1692년 1월 아홉 살 난 목사의 딸 베티와 열한 살 난 목사의 조카 아비게일 그리고 열두 살 난 마을유지의 딸 앤 퍼트넘이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의사는 그 소녀들이 마법에 걸려 '악마의 손'안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이상한 행동을 보인 소녀들은 부두교(Voodoo) 가르침에 열중하고 있는 몇 명의 서인도 제도 출신 하녀들을 마녀라고 고발했다. 소녀들에게 점쟁이놀이를 가르쳤던 패리스 가족의 노예인 인디언 티투바가 의심을 받았다. 티투바, 마을 여인 세라굿과 세라 오스번은 2월 29일 마녀 혐의로 체포돼 투옥되었다. 이들이 투옥된 후 수많은 사람들이 기소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세 소녀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매사추세츠 식민지 전역은 공포에 휩싸였다. 총독 윌리엄 핍스는 특별법정을 소집하여 150명 이상의 주민(대다수가 여성)을 마녀혐의로 기소했다.
마녀고발을 시작했던 소녀들이 후에 자기들의주장을 취소하고 자기들의 이야기는 꾸며낸 것이라고 말했지만 재판을 계속되었다.
평등의 문제는 내내 식민지 미국을 괴롭힌 쟁점이었다. 1716년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통과한 법률은 투표권을 부여하기 전에 종교와 재산에 관한 엄격한 심사를 하도록 규정했으며, 특히 유대인과 흑인들에게는 투표권으르 주지 않았다. 로드아일랜드주에서는 투표권을 가지려면 최소한 40파운드의 재산을 소유해야 했으며, 가톨릭신자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독립전쟁 때까지 13개 중 7개 주는 재산소유자에게만 투표권을 허용했다.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학생선발엔 가문이 큰 영향을 미친다. 미국 제 43대 대통령 조지 W.부시의 경우가 그걸 잘 말해준다. 그는 대학 진학 시 원서를 예일대와 텍사스대 두 곳에 냈는데, 텍사스대엔 불합격했다. 또 부시는 예일대를 나온 후 텍사스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했지만 자격미달로 입학을 거부당해 하버드대학원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칼뱅의 분노한 편협성은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편협성보다 더욱 폐좨적이고 잔인했다. 칼뱅에게 제네보보다 더 큰 활동공간이 맡겨졌더라면 그는 정치적 평등의 사조(로베스피에르)보다 훨씬 더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이다"
18세기 중반 천문학자들은 금성이 1769년 6월 3일에 태양면을 통과할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런던의 영국학술원은 100년에 한 번 있는 이 천문학적인 사건을 관측하고 기록하기 위해 타히티로 원정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768년 5월25일 해군 대위 쿡이 원정대장으로 임명되었다. 368톤의 엔데버(Endeavour)호 함정을 이끈 쿡은 항해학과 천문학의 탁월한 전문가였다.

작가강준만출판인물과사상사발매2010.03.12
"영국에서는 지금도 선거권이 모든 계층의 국민에게 주어진다면 지주들의 재산권이 불안해질 것이다. 토지개혁법이 제정될 테니까. 이런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 우리 정부는 개혁에서 이 나라의 이익을 영구히 지키고, 소수의 부자들을 다수의 횡포에서 보호하기 위한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Chomsky, 1999.2005)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면서 혁명의 불꽃은 타올랐지만, 함락 당시 그 안에 갇혀 있던 죄수는 정치범이 아니라 4명의 위조범과 2명의 정신병자와 방탕한 젊은 귀족 한 명 뿐이었다. 바스티유 감옥 함락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을 뿐 삼부회의 소집이 사실상 프랑스혁명의 서막이었다.
이 최초의 기효틴 처형이 있은 지 1주인도 되지 않아 파리의 거리에서는 기요틴을 작으느 모형으로 만든 장난감이나 기념품 또는 귀걸이 등이 팔려 나갔다. 기요틴의 발명자는 해부학자이며 외과의사였던 앙투안 루이로 처음엔 루이제트 또는 루이종 으로 불려졌지만, 루이제트의 성능을 증언한 데다 그런 기계의 필요성을 처음 제안했던 기요탱이 더 유명해지는 바람에 기요틴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Loon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공적인 불관용의 광기가 다하면 그 즉시 사적인 불관용이 시작되고, 관이 처형을 그치면 린치가 시작된다."
시카고는 "양파 냄새가 나는 곳"이라는 인디언 말에서 유래했다.
부통령이 된 매사추세츠 주지사 엘브리지 게리는 이 선거에서 역사에 남은 용어 하나를 만들어냈다. 그는 새로운 상원선거구법을 입안하여 몇 개의 선거구에 연방당의 지지표를 집중시킴으로써 민주공화당이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도록 만들었는데, 이렇게 나누어진 선거구들 가운데 하나의 윤곽이 불도마뱀을 닮은 것으로 생각되어 게리와 샐러맨더를 합성한 "게리맨더링"이란 용어가 생겨났다. 오늘날 "게리맨더링"은 자의적인 선거구획적을 의미한다.
웬 [로마인 이야기]와 [삼국지]는 그리도 좋아하는지! 특히 수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는 우울하다는 이유로 적극 외면한다.
페니 신문들은 광고도 이전의 '주장형 의견광고'에서 '상업광고'로 전환했다.
페니 신문이 선구적인 신문사업가들의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가능했던 건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적 변화였다. 인쇄기술의 발달, 교통과 통신 시설의 발달, 인구의 증가, 산업화에 의한 소득증대, 문맹률의 감소, 도시화 등이 페니 신문의 출현을 가능케 한 배경이었다.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흥행사'로 불리는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1810~1891)이다. '미국 광고의 아버지'니 '광고의 셰익스피어'로도 불리는 그는 1880년대까지 맹활약하지만, 그가 활동을 시작한건 1830년대부터였다. 이하 생략.....
독립 직후 텍사스인들은 미합중국에 합병되고자 하는 그들의 갈망을 표시하기 위해 텍사스 깃발에 큰 별 하나를 그려 넣었다. 오늘날에도 텍사스를 론스타공화국(Lone Star Republic)으로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런던시는 최고의 흥분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영국의 이러한 기쁨은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나타난 미국 측의 태풍 같은 환호 소리에 비교해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곧바로 가게들은 문을 닫아걸었고 거리거리에는 온통 질문하고 소리지르고 토론하는 사람들의 물결이 흘러 넘쳤다. 완전히 무명이었던 필드는 하룻밤 새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전신선 1만2000마일 가설 후 츠바이크가 묘사한 글.
다시 츠바이크의 실감나는 묘사
"저 위대한 황제와 시저 시대 이후로 그 어떤 승지자도 자기 국민으로부터 이토록 축하받은 일은 없었다. 이 좋은 가을날에 도시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축하행렬이 행진하는 데 여섯 시간이나 걸렸다. 연애들이 깃발을 앞세우고 국기가 펄럭이는 거리들을 지나가면 그 뒤를 합창대, 노래패, 소방대, 학생, 퇴역군인 등이 끝없는 열을 지으며 따랐다. 행진할 수 있는 자는 모두 행진했고, 노래할 수 있는 자는 모두 노래했으며, 기뻐할 줄 아는 자는 모두 기뻐했다. 필드는 고대로마의 개선장군처럼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에 타고 있었고 또다른 마차에는 나이아가라호의 선장이, 그리고 또다른 마차에는 미합중국 대통령이 타고 있었다. 시장들과 관리들과 교수들이 그 뒤를 이었다.
끊임없이 간단한 인사말, 잔치, 횃불행진 등이 이어졌고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으며 축포도 터졌다. 그런 후엔 또다시 환호의 물결이 제 2의 콜럼버스를 금방 둘러싸곤 했다. 두 세계를 하나로 합친 인물, 공간을 정복한 승리자, 이 순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신격화된 남자인 사이러스 필드를."
"당신의 온몸으로 투표하라. 단지 한 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지라.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이다. 그때는 이미 소수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소수가 전력을 다해 막을 때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 의로운 사람들을 모두 감옥에 잡아 가두든가, 아니면 전쟁과 노예제도를 포기하든가의 양자택일으르 해야 한다면 주정부는 어떤 길을 택할지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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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의 책을 읽어봐야겠다.
"한 사람으로서의 다수"
강준만교수가 유명한 사람인지 몰랐는데....
엄청 유명한 사람이었단다.
음...역시... 어쩐지...재미나더라.
3권은 아직 빌리지도 못했다.
지금 읽고 있는 책 다 읽고 빌리자.
뭐... 2권을 읽고 감상평을 적을만한건 없다. 다만 소로를 읽고 싶어짐.

작가강준만출판인물과사상사발매2010.03.12
박람회와 뗄 수 없는 게 바로 백화점이다. 백화점은 사실상 상설화된 작은 박람회였다. 세계 최초의 백화점은 1852년 프랑스 파리에 부시코가 세운 봉마르셰다. 이전의 상점과 비교하여 ‘최초’라는 의미를 부여할 만한 무슨 차별성이 있었는가? 당시는 나폴레옹 3세가 다스리던 시대로 봉건주의 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이행하던 시기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인에 대한 평판은 좋지 않았다. ‘교활’이나 ‘사기’같은 이미지가 강했다. 이런 이미지는 주로 흥정과정에서 발생했는데, 봉마르셰가 정찰제를 들고 나왔다는 것 자체가 혁명이었다. 여기에 강매가 없었고 교환과 반품을 보장해주었다는 것도 놀라운 발전으로 여겨졌다. 각국에서 무엇을 백화점의 시초로 보느냐에 따라 이견이 있긴 하지만, 명실상부한 백화점은 각기 6년여의 시차를 두고 미국, 영국, 독일로 전파되었다. 1858년 미국 뉴욕 맨해튼 번화가에 롤런드 H. 메이시가 세운 메이시가 들어섰고, 이어 1863년 영국 런던, 1870년 독일에도 백화점이 등장했다. 1858년의 메이시는 아직 백화점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장갑 손수건 리본 등을 파는 수수한 상점이었다. 메이시는 현금구입, 정가판매, 저렴한 가격, 적극적인 선전 등 4대 원칙을 실시하면서 급성장을 이룩했다. 1872년 상점이 11채의 건물로 늘어나면서 백화점다운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미국에선 메이시에 뒤이어 로드앤테일러, 헨리 벤텔, 버그도프 굿맨 등과 같은 대형백화점들이 들어섰다. 이제 곧 소비주의가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등장하는 시대의 전조라고나 할까?
‘브라운의 처형으로 버지니아에서 노예제도는 견고해졌을지 모르지만, 미국의 민주주의는 붕괴될 것이다. 당신들은 치욕을 보존했고, 영광은 죽였다.”
브라운이라는 이름은 남북전쟁시에도 계속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며, 북군의 군가에까지 등장했다. 그의 투쟁과 죽음을 묘사한 ‘존 브라운의 주검’이란 노래는 북군이 가장 즐겨 부른 군가였다. 앞서 보았듯이 브라운을 예수와 동일시하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그러나 남부에서는 반대로 그만큼 브라운과 그의 찬양에 대한 반감이 커져만 갔다.
‘마틴 루터킹에 버금가는 흑인 해방론자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광신적 미치광이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
‘(조잡하게 정의된)노예제도는 단지 우리의 역사적 운명이 극복해야 할 시대착오였는가, 아니면 미국의 꿈의 구조적 토대였고 핵심적 부수물이었는가? 미국의 딜레마는 현명함과 합리성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자기모순인가 아니면 우리 체제의 구성요소인가?’
<게티즈버그 연설 전문>
‘87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자유의 신념으로 이 대륙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믿음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대규모 내전을 치르며 이 나라나 그만큼의 신념을 갖고 헌신한 다른 나라가 얼마나 오래 견뎌낼 수 있는지 시험하는 전쟁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터의 일부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이들의 마지막 휴식장소로 만들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이곳을 신성화할 수 없습니다. 죽기를 무릅쓰고 여기서 싸웠던 용사들이 이미 우리의 미약한 힘으로는 더하거나 뺄 수 없을 정도로 이곳을 신성화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하는 말을 그리 오래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이 이곳에서 한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너무도 고귀하게 이루려다 못다 한 일에 전념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살아 있는 우리들입니다. 여기서 우리 앞에 남겨진 위대한 과제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 과제란 그들의 명예로운 죽음을 통해 그들이 마지막 힘을 다한 명분에 더 크게 헌신하고, 그들의 희생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의하고, 하나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가 새로운 자유를 잉태하게 하며, 국민의 국면에 의한 국믄을 위한 정부를 이 세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남북전쟁은 전쟁에 나간 4명 중 1명이 목숨을 잃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남북을 합쳐 총 군인 전사자는 62만명으로, 이는 훗날의 1차 세계대전 전사자 11만5000명이나 2차대전에서 죽은 31만8000명보다 훨씬 많은 수다. 베트남 전쟁을 포함하여 미국이 치른 모든 전쟁에서 죽은 수를 합한 것보다 많다. 인구 10만 명 당 거의 2000명이 사망한 꼴인데, 1차 세계대전에서는 그 비율이 109명이었고 2차 대전에서는 241명이었다. 왜 이렇게 전사자가 많았던 걸까? 가장 큰 이유는 신무기는 개발됐는데, 이에 대한 경험이나 대응 전략 전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사자가 62만명이면 부상자는 얼마나 많았겠는가…. 중략… 영국에선 1840년까지 모든 노예를 해방했다. 6년에 걸쳐 영국 정부는 노예소유주들에게 노예가격의 약 40퍼센트에 해당하는 금액을 보상했다. 다른 나라들도 노예해방을 평화롭게 이뤘다. 아르헨티나(1813), 콜롬비아(1814), 칠레(1823), 중앙아메리카(1824), 멕시코(1829), 볼리비아(1831), 우루과이(1842), 베네수엘라(1854) 등이 그런 나라들이다. 남북전쟁 기간과 그 이후에도 네덜란드 식민지(1863), 브라질(1871~1878), 푸에르토리코(1873), 쿠바(1886) 등지에서 노예해방이 이루어졌다. 딜로렌조는 “노예제는 얼마든지 평화롭게, 적은 희생과 땀으로 종식될 수 있었던 것”..이하 생략
앤드루 델반코는 1998년 하버드대학 강의에서 링컨은 개인적 절망감을 원동력으로 삼아 공적 활동을 펼쳤다며 “정의를 사수하려는 열정이 우울증 치료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링컨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고 주장했다.
목장 주인들은 자기 소와 남의 소를 구분하기 위해 소에 소인표시를 했다. 이른바 브랜드의 탄생이다. 브랜드는 원래 불꽃이라는 어원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서 ‘타고 남은 것’이라는 의미가 파생했고, 그것이 가축 등에 찍는 소인으로 확대되었다. 그랜드는 소인과 연상돼 오명 또는 낙인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지만, 오늘날엔 주로 상표나 특정 상품 기업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1890년대 초 와이오밍엔 5000가지, 몬태나엔 1만2000가지의 브랜드가 존재했다. 표식이 찍히지 않은 소는 매버릭이라고 불렀다 이는 자기 소에 브랜드를 찍지 않은 새뮤얼 A. 매버릭(1808~1870)이라는 어느 텍사스 목장주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오늘날 매버릭은 ‘무소속 정치가’나 ‘독불장군’이란 뜻도 있다.
.. 와이오밍이 여성 선거권을 부여한 최초의 주가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1890년경 서부주들에서 목장이나 농장을 소유한 여성은 25만명 이상이었다.
그랜트
“취임 직후 이렇게 많은 가족군단을 데리고 백악관에 입성한 대통령은 없었다”
“그가 발표한 내각의 면면은 너무나 형편없어 발표되는 이름마다 수치심을 느끼게 할 정도”
그랜트의 시대는 로비의 시대였다. “로비스트”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이 바로 그랜트다. 그는 부인이 담배 냄새를 싫어해 백악관에서 두 블록 거리에 있는 윌러드 호텔에 자주 들러 시가를 피우고 브랜드를 마시곤 했는데, 이 호텔에는 정치인들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 1층 로비에서 장사진을 치곤 했다. 이를 보고 그랜트가 “로비스트들이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용어가 영국에서 먼저 스였다는 설도 있으나, 미국에서의 원조는 그랜트인게 분명하다. 훗날 백악관에서 세 블록 떨어져 동서쪽으로 횡단하는 도로인 ‘K스트리트’주변에 로비 관련 회사들이 몰려들면서, 워싱턴의 로비 세계를 뉴욕의 월스트리트와 비교해 ‘K스트리트”라고 부르게 된다.
에디슨과 벨의 적대 관계는 ‘helle’대 ‘ahoy’의 대결로도 나타났다. 벨은 죽을 때까지 전화통화를 시작할 때에 ‘ahoy’나 ‘hay’를 쓸 것을 고집했고, 실제로 자신은 그렇게 했다. 에디슨이 “hello’를 쓰면서 이게 빠른 속도로 번져나가는 것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결국 전화는 벨이 발명했다지만 이 경쟁은 에디슨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원칙 없는 삶] (1863)
“이 세계는 비즈니스 위주다. 끝없는 부산함의 세계다! 나는 한밤중에 기관차 소리 때문에 잠을 깬다. 내 꿈을 방해한다. 안식일은 없다. 사람들이 쉬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본다면 정말 영광일 것이다. 오직 일, 일, 일 뿐이다”
‘기업들은 마침내 권좌에 올랐다….. 뒤이어 고위직의 부패시대가 도래할 것이고, 돈의 힘이 인간에게 편견을 전파하여 부는 극소수의 손 안에 통합될 것이며 공화제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자신의 영토를 더욱 증대시키고자 노력할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사망하기 직전에 한 말이다.
1888년부터 1908년 사이에 미국의 기업들은 최전성기를 구가하지만, 이 기간 중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는 70만 명(대략 10일에 100명씩)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과 사기꾼의 경계가 불명확해진건 당연한 일이었다.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에디슨의 이름으로 등록된 특허는 무려 1097개.
제시 제임스(1847~1882), 프랭크 제임스(1843~1915)사건.
침례교 선교사였다가 미주리주에서 농부가 된 사람의 아들인 제임스 형제는 남북 전쟁기간 중에 남부연합을 위해 맹렬히 싸운 전사들이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났는데도 일단의 패거리를 이끌고 기차와 역마차를 습격하는 등 게릴라 공격을 계속 했다.
제임스 형제는 저항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살해하면서도 친구, 성직자, 남부사람, 과부 등에게는 강도짓을 한 적이 없다고 자랑하곤 했다. 이들은 전설적인 무법자로 명성이 자자했다. 미주리주와 캔자스 주의 경계에 있는 농촌지역에서 특히 제시 제임스는 남부의 대의명분을 맹렬하게 추종하는 로빈후드 스타일의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진편에 헌신했다는 이유로 양키 당국자들이 자신을 박해했기 때문에 범죄의 길로 내몰리게 되었다는 그의 주장을 농부들은 믿었다. 마을의 보호를 받은 이 무법자 형제는 17년 동안 체포의 손길을 피해 살았다.
1882년 미주리 주지사 크리텐든은 두 무법자 처단에 1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제임스 형제의 패거리였던 로버트 포드가 주지사에게 연락해서 현상금에 덧붙여 자신과 동생 찰리의 죄를 사면해주는 대가로 제시를 넘기겠다고 제안하자, 크리텐든은 이를 수락했다. 포드는 무엇이 겁이 났는지 제시 제임스를 생포해서 넘기는 대신에 4월 3일 살해했으며, 형인 프랭크 제임스는 10울 5일 주지사에게 자수했다.
그는 1865년 전쟁이 끝난 후 실업자 신세가 되어 뉴욕의 호화로운 프렌치스 호텔에 들어갔다가 호텔 짐꾼에게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23년 후인 1888년 이 호텔을 사서 부순 다음 그 자리에 신문사 건물을 지었다. 1890년 완공된 이 건물은 16층으로 당시 미국에선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조지프 퓰리처의 그런 ‘아메리칸 드림’은 언론인 활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작가강준만출판인물과사상사발매2010.03.12
입상은 1884년 완성됐으며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파리에 서 있었다. 여신상을 분해해 배에 싣는 데도 엄청난 기술과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해체와 분해, 재조립을 맡은 사람은 5년 후 에펠탑을 건축할 귀스타브 에펠(1832~1923)이었다.
아니키즘(anarchism)은 정치적 권위의 일반원리를 부정하면서, 그러한 권위 없이도 사회질서가 이룩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이념과 운동이다.
1886년 5우러 조지아주 녹스빌 출생으로 애틀랜타에서 활동하던 가난한 늙은 의사인 존 S. 펨버톤이 피나는 노력과 인내로 코카콜라를 발명했다.
코카콜라 탄생 무렵의 미국은 ‘매약의 전성시대’였다.
1950년 코카콜라는 전 미국 청량음료 시장의 50%를 점유했으며, 1960년엔 1분당 4만 병, 1993년엔 전 세계적으로 1초당 4만 병이 소비되었다.
1888년 조지 이스트먼(1854~1932)의 ‘코닥’카메라 탄생
침실 12개를 포함하여 방이 37개나 딸린 호화주택에서 어머니와 함께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건강이 나빠지자 1932년 모든 재산을 병원과 대학에 기증하고 “내 일은 끝났다. 더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다”는 유서를 남긴 채 권총으로 자살했다.
1890년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
“이제 호주로 가는 거야. 그곳 역시 금이 많으니까. 이곳보다는 나을 거야”
프런티어
1평방마일당 거주하는 사람이 2명이 되지 못한 지역을 ‘프런티어’로 정의
루터 스탠딩 베어 [얼룩 독수리의 땅](1933)에서 ‘황야’라는 개념의 실체를 인디언의 시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오직 백인들에게만 자연은 ‘황야’였고, 오직 그들에게만 대지는 ‘야생’동무로가 야만인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는‘곳이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자연은 길들여져 있는 온순한 것이었다. 대지는 기름졌고, 우리는 위대한 신비가 내려주는 가득한 축복 속에 있었다. 동쪽으로부터 탈 많은 사람들이 와서 광기러인 잔혹함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수많은 불의를 자행했을 때, 우리들에겐 그것이야말로 ‘야생적인’일이었다. 숲속의 동물들이 다가오는 백인들을 피해 도망가기 시작했을 때, 우리에겐 그 것이 바로 ‘무법천지 서부’의 시작이었다”
서부영화는 텔레비전까지 점령했다. 1950년대 중후반 시청률 10위까지의 프로그램 가운데 웨스턴드라마는 7개를 점유하기도 했다. 웨스턴물의 범람은 변형된 웨스턴물을 낳게 했으며, 그 대표적인 작품이 NBC가 1959년부터 방영한 <보난자 Bonanza>였다. “웨스턴 소우프 오페라”로 불린 <보난자>는 그후 무려 14년간 일요일 저녁에 고정편성되는 불후의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리프킨(2005)은 미국과 유럽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다른지를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은 사형제도에 대한 양측의 견해차이를 분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미국인들과는 달리 유럽인들은 사형제에 열정적으로 반대하는 편이다. 그 이유에 대해 리프린은 이렇게 말했다.
“우선 그들은 20세기 들어 정부에 의해 자행된 인명살상과 파괴행위를 너무도 많이 겪었기 때문에 국구가 인간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에 혐오감을 갖는다. 20세기에 세계적으로 희생된 인명은 1억8700만 명 이상이며, 그중 다수가 유럽에서 목숨을 잃었다. 유럽인들에게 사형은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일깨운다”
반면 미국인들은 다수가 사형제에 찬성한다. 찬성자의 37퍼센트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약성서의 격언을 그 이유로 들었다. 신약성서 여러 곳에 등장하는 용서의 가르침은 외면하는 것이다. 범죄에 대한 미국인들의 정서는 본질상 보복적인데, 미국 심리학자들은 그 이유의 일부를 서부개척 시절 재산권의 보장이 허술했을 때 자신의 재산을 보호할 필요성과 이런 전통이 대중문화를 통해 확산된 탓으로 보고 있다.
유럽과는 확연히 다른 미국의 높은 이주율도 프런티어 문화의 산물이다. 19세기에는 10년마다 노동자 거주지역의 주민들이 완전히 바뀌었을 정도였다. 이는 계급에 기초한 단체나 기구들이 생겨나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데에 악영향을 미쳐 계급중심의 연대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미국에 사회주의가 없는 한 요인이라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은 성욕을 ‘마지막 프런티어’라고 했다지만, 미국인들의 프런티어에 ‘마지막’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1893년 3월 ‘필라델피아 앤 리딩 철도회사’는 막대한 돈을 빌려온 영국 은행들의 지불요구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파산을 선언했다. 이른바 ‘1893년 공황’의 시작이다. 6개월 내에 8000개 이상의 기업, 156개의 철도회사, 400개 은행이 문을 닫았으며, 노동력의 20퍼센트 정도인 100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철도건설도 여전히 무시무시한 작업이었다. 1890년에서 1917년까지 7만2000명의 노동자가 철로에서 사망했고, 200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기관차고와 정비소에선 15만8000명이 사망했다.
풀먼 객차회사 파업
미국철도노동조합은 노동기사단까지 흡수하여 1894년 풀먼 객차회사를 상대로 파업에 돌입했다. 1864년 기차차량의 계단식 침대를 발명한 공동발명자이자 그 침대를 만드는 회사의 소유주인 조지 풀먼으느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파업과 무정부주의자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시카고 남쪽 600에이커 땅에 개인영지를 만들고 약 1만2000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살게끔 한 뒤, 이 마을의 이름을 풀먼이라고 지었다. 한 노동자는 “우리는 풀먼의 집에서 태어나 풀먼의 공장에서 생계를 해결하고 풀먼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풀먼 교회에서 교리문답을 한다. 그리고 죽으면 풀먼 지옥으로 간다”고 말했다. 금융공황이 지속되고 있던 1894년 그의 회사가 2500만 달러의 이윤을 기록했는데도 풀먼은 검약 캠페인을 벌여 노동자들을 해고한 다음 25퍼센트가 인하된 임금으로 다시 채용하는 수법을 썼다. 풀먼 마을의 주택임대료는 근처 마을들의 시세보다 25퍼센트 높았는데, 노동자 3명이 임대료를 낮춰달라고 하자 풀먼은 그들을 해고해버렸다. 이런 일련의 횡포가 파업의 불씨가 되었다.
바로 그해(1895)에 유럽에선 프랑스의 사회심리학자 귀스타브 르봉(1841~1931)이 [군중:대중의 정신연구]를 출간했다. 그는 ‘군중의 시대’가 왔다고 선언하면서, 중산층을 지배하던 이성의 법칙에 대중이 얽매이지 않으며, 군중과 대중이 세계를 장악한다는 새 시대의 모습을 제시했다. 그가 말한 ‘군중’은 단순무식한 사람의 집단이 아니라 “도덕적 지적인 개성을 상실한 사람들이 그들을 조종하는 사람의 암시에 따라 거대한 에너지를 발휘하는 인간집단”이다. 그는 “집단 내에 쌓여가는 것은 재치가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집단은 높은 지능이 필요한 행동을 할 수 없으며, 소수 엘리트보다 언제나 지적으로 열등하다”고 말했다. 훗날 무솔리니는 이 책을 늘 머리맡에 두고 탐독하였다던가.
허스트가 철도회사의 무법적인 권력에 대항하는 캠페인을 전개하는 등 인민의 대변인으로 변신해 개혁운동에 앞장선 건 당시의 시대상황에 따른 상업주의 전략이었다. 그의 신문철학은 독자들의 입에서 “원 세상에(gee-wiz)”라는 말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1896년 허스트는 [뉴욕 저널]을 인수해 퓰리처의 [뉴욕 월드],에 도전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이때에 ‘대중신문’의 모든 본색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두 신문이 벌인 치열한 경쟁의 와중에서 비롯된 저널리즘을 가리켜 황색 저널리즘이라고 하는데 황색 저널리즘은 ‘영혼이 없는 뉴 저널리즘’으로 불린다. 1896년에서 1901년까지 전성기를 맞는 황색 저널리즘이란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렇다.
허스트의 주특기는 ‘사람 빼내가기’였다. 그는 돈으로 [뉴욕월드]의 기자들을 빼내간 건 물론이고 [뉴욕월드]에 첩자까지 심어놓았다. 그래서 퓰리처는 기자들에게 지시를 내릴 때 암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허스트는 1896년 퓰리처의 [뉴욕월드]지 일요일판인 [선데이 월드]에 대항해 [선데이 월드]지의 제작진을 몽땅 비밀리에 돈으로 매수해 [선데이 저널]을 창간하였다. [선데이 월드]지에 게재된 인기 만화 [노란 꼬마]의 작가 리처드 펠튼 아웃콜트(1863~1928)도 [선데이 저널]로 가 ‘노란 꼬마’를 그렸다. 아웃콜트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만화 시리즈 [호건의 골목길]을 만든 사람으로, 이 만화의 주인공은 반짝이는 눈동장 웃을 때면 앞니가 빠진 자국이 드러나는 장난꾸러기 소년이었다. 이 아이는 노란색 잠옷처럼 생긴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 떼문에 ‘노란 꼬마’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선데이월드]는 새로운 만화가를 고용해 계속 [노란 꼬마]를 그리게 함으로써 두 신문 사이에 ‘노란 꼬마’경쟁이 붙었다. 두 신문 간의 상호공격적인 PR,로 당시 뉴욕 시내 어디에서나 ‘노란 꼬마’를 볼 수 있었다. [뉴욕 프레스] 편집국장 어빈 워드맨은 끔찍한 사건과 스캔들을 이용하는 두 신문의 방식을 가리켜 ‘황색언론’이라 불렀는데, 이게 바로 ‘황색 저널리즘’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허스트의 전쟁”
1896년 쿠바에 파견된 허스트 신문의 삽화기자 프레더릭 레밍턴(1861~1909)이 쿠바에 전쟁이라고 할 만한 사건은 없으므로 귀국하겠다고 했을 대에 허스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그림만 그려 보내면 전쟁은 내가 만들어내마.(You’ll fumish the pictures and I’ll fumish the war.)
스페인 전쟁이 ‘허스트의 전쟁’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만약 1895년에 일어난 쿠바 폭동사건 당시에 허스트가 발행부수 경쟁에서 퓰리처계의 신문에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할 정도다.
스페인 전쟁은 4개월 만에 끝났다. 이 전쟁으로 희생된 미국인 수는 5462명이었지만, 순수한 전사자는 379명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 황열, 말라리아 등의 질병으로 사망했다. 8월 중순 휴전조약을 거쳐 1898년 12월 10일 파리평화조약에서 필리핀, 푸에르토리코의 할양 그리고 쿠바의 독립이 결정되었다. 마리아나스와 괌도 미국에 할양되었다. 미국은 이렇게 해서 새로 얻은 지역을 ‘새로운 프런티어’라고 불렀다.
‘과시적 소비’
값이 비쌀수록 호사품의 가치는 커진다. 비싸지 않은 아름다운 물건은 아름답지 않다. 호사스러움을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자신만 알아서는 안 된다. 남들이 알아줘야 한다. 유한계급에게는 가격표가 본질적으로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런 ‘과시적 소비’의 속성을 가리켜 ‘베블런 효과’라고 한다. ‘베블런 효과’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비합리적인 소비행위임에 틀림없지만, 세상은 결코 합리적이지만은 않다.
부자들의 옷은 눈에 잘 띄는 여가의 증거를 제공해야 하는데, 유지하는데 신경이 많이 쓰이는 소재의 옷을 입는 것도 한 방법이다. 노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패션도 그래서 나왔다 굽 높은 구두도 그런 뜻에서 나온 것이며, 과거 중국 귀족들이 손톱을 길게 길렀던 것도 마찬가지다.
돈으로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권력과 가치관을 과시하는 새로운 엘리트의 출현은 사회의 작동방식이 이전보다 더욱 복잡해졌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지만, 그 내막은 금권의 사회통제력 강화였다. 부자들의 ‘약탈충동’은 상원까지 지배했다.
1878년 서구열강은 지구의 67퍼센트를 차지했는데, 1914년엔 지구의 85퍼센트를 식민지, 보호령, 신탁통치, 연방 등으로 소유한다. 아프리카의 경우 1914년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르르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이 유럽의 식민지가 되었다. 각 나라별로 집어삼킨 면적을 보자면, 프랑스 423만8000제곱마일, 영국 349만 5000제곱마일, 독일과 이탈리아가 각각 약 100만 제곱마일, 벨기에 80만 제곱마일, 포르투갈 78만 제곱마일, 스페인 7만5000제곱마일 등이었다.
1900년 사회노동당의 일부 세력과 연합하여 사회당을 창당한 유진 데브스도 이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10만표 가까이 특표했다. 투표일 하루 전날 전국 신문들은 데브스가 민주당을 지지하고 후보를 사퇴했다는 허위기사를 유포시키기도 했다.
마크 트웨인의 활약
루스벨트의 반대편에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있었다. 트웨인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남북 전쟁 이후 미국에 내린 가장 강력한 재앙'이라고 선언했다. '루스벨트는 정치세계의 톰 소여다. 항상 과시하고, 과시할 기회를 찾아다닌다. 그의 광적 상상력에서, 위대한 공화국은 거대한 바넘 서커스단이다. 그곳에서 자신은 광대 역할을 하고, 이 세상은 관객 역할을 한다."
트웨인은 1894년 파산 이후 비판적 지식인으로 전환했다.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는 강연여행을 하면서 4년 만인 1898년에 빚은 다 갚았지만, 이후 공세적 진보활동을 계속했다. 열렬한 민주당원이었던 그는 불성실한 정치가들을 공격하며 정치사회적 불평등을 고발했다. 트웨인은 독설적인 풍자의 대가였다.
"자비로운 하나님은 우리가 이 나라에서 대단히 귀중한 세가지 재산을 갖도록 허락했다. 언론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그리고 이 자유들을 한 번도 활용하지 않는 총명함"
"가장 기괴하게 느낀 것은 전시장의 벽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마크 트웨인의 연표가 19세기의 마지막에서 종지부를 찍고 있는 것이었다"
트웨인은 1910년에 죽었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아무래도 트웨인의 반전활동이 그 이유인것 같다. 이는 미국의 무용사 책들이 이사도라 덩컨을 다루면서도 그녀가 사회주의 러시아에 귀화한 1921년 이후의 활동은 빼놓는 것과 같다. 덩컨은 프랑스의 니스에서 목에 두른 스카프가 자동차 바퀴에 감기는 바람에 목이 졸리고 목뼈가 부러져 숨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국에서 20세기의 트웨인으느 외면되고, 루스벨트의 어두운 면은 가려진다.
하와이 이민 102명 1902년 12월 22일 인천항 출발
조국을 떠난 조선인들.. 국내에선 외세에 휘둘리고, 국외에선 피부 색깔 때문에 차별을 받아야 하는 슬픈 디아스포라
1783년 6월 4일 프랑스의 발명가 몽골피에(Montgolfier)형제가 인류 최초로 열기구를 만들어 고도 약 1800미터까지 상승해 10여분동아나 체공
훗날 루스벨트는 전투기 조종사이던 막내아들이 1918년 프랑스 공중전에서 전사하고, 큰 아들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전사함으로써 1 . 2차 대전에 아들 하나씩을 잃은 아머지가 된다. 오늘날 루스벨트가 미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작가강준만출판인물과사상사발매2010.07.05
일단 책에서 메모해둔 부분만 옮겨둔다.
이승만에 대한 욕만 들어서 막연하게 너무 치우친 의견 아니었을까 했는데....
너무 담담하게 있었던 사실만 써둔 이 책을 통해서 살짝만 봐도...그는.... 정말 마사오 못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사 산책 7
평화의 유지라는 것은 한 집단이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시도를 은폐하는 수단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사망한 독일인은 모두 680만 명. 전쟁 막바지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사람만도 30만 명에 부상자(중상)는 거의 100만 명에 이르렀다. 독일도 더 이상 전쟁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내몰렸던 것이다. 만약 히틀러가 1938년에 전쟁을 멈추었더라면 그는 인류역사에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히틀러는 비스마르크 이래 독일 최고의 지도자로 추앙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멈춰야 할 지점에서 멈추지 못하는 것이 바로 히틀러의 특성이었다. 이는 1941년 6월 22일에 시작한 소련 침공이 12월에 이르러 교착상태에 빠지자 히틀러가 난데없이 대미 선전포고를 하는 그야말로 ‘미친’ 결정을 내린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맨해튼 프로젝트
원자폭탄 개발계획은 1939년 이탈리아 화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컬럼비아대학에서 미 해군장교들과 핵분열물질을 군사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토론했을 때 시작됐지만 이때는 단지 토론 수준에 머물렀다. 그런데 바로 그해에 대통령고문 알렉산서 색스를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된 한 통의 편지가 원자폭탄 제조를 건의했다. 발신인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이었다.
38도선은 미국과 소련 모두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미국은 소련이 이 분할안을 선선히 응낙한 데 대해 놀랐고 소련은 위도가 그토록 후하게 남쪽으로 내려간 데 대해 놀랐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전날부터 항복선언이 담긴 일왕의 녹음판을 빼앗으려고 난동을 부렸던 결사항전파와 극우파들의 할복자살이 잇따랐다.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1887~1945)는 이미 새벽에 배를 가르고 죽어 있었으며 5명의 대장이 할복하고 장교 100명 이상, 민간인 30여명이 패전 자살의 길로 뛰어들었다.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전후 연합군의 군사법정에서 포로학대 등의 혐의로 처벌받은 BC급 전범 5700여 명 가운데는 조선인 148명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 대부분(129명)이 반강제적으로 동원된 포로감시원들이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5월 일본 육군은 말레이, 자바 등에서 펼친 남방작전에서 붙잡은 26만 명이 넘는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기 위해 조선에서 3000명의 포로감시원을 모집했다. 계약기간이 2년이라는 점과 징병으로 끌려가지 않는다는 점이 주요 지원 이유였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조선인들 중 129명은 포로학대를 이유로 전점 처리됐고 23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일본인은 겨우 7명이었는데도 말이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군인도 아닌 군무원 신분이었지만 전범자로 처리된 비율은 악명 높았던 일본 헌병(4.3%)과 맞먹을 정도였다. 게다가 기시 노부스케(1896~1987) 전 상공대신, 아베 겐키 전 내무대신 등 A급 전범용의자들은 1948년께 일찌감치 석방됐고 천황의 전쟁책임은 불문에 부친 점을 감안하면 전후 전쟁범죄 재판은 한 편의 거대한 사기극이었던 셈이다.
마셜플랜
1947년 6월 5일 5성장군 출신인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하버드대학 졸업식연설에서 이른바 ‘마셜플랜’으로 알려진 유럽 부흥계획을 역설했다. 마셜은 전쟁으로 파괴된 유럽의 참상을 거론하면서 “미국은 세계경제가 정상화되도록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 안정도, 항구적 평화도 없다. 우리의 정책은 특정국가가 아니라 기근, 가난, 절망, 혼돈을 막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셜플랜은 인도주의적 목적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마셜은 이미 1개월여 전인 4월 28일 “서방은 이제 소련에 대한 정책에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을 건넜다”고 선언했다. 마셜플랜으느 4년간 유럽의 선별된 국가들에 120억 달러 이상의 돈을 퍼붓는 경제적 원조로 소련의 팽창주의를 저지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마셜플랜’ 직후 미국의 대소 봉쇄정책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마셜플랜이 소련을 배제하자고 결정되었던 건 아니다. 미국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는 내심 소련이 스스로 빠지기를 원했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전쟁동맥국’’인 소련을 배제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6월 27일 마셜플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소련 외무장관이 프랑스에서 만났는데 소련은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퇴장해버렸다. 스탈린의 지시 때문에 그랬다는 설도 있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계획된 작전의 결과였다는 설도 있다. 정치가 에이버럴 해리먼은 “영국과 프랑스가 실로 교모하게 소련을 마셜플랜에서 배제시켰다”고 말했다.
FBI의 감시가 어찌나 혹독했던지 아인슈타인은 1947년 “나는 이 나라에 참으로 위대한 자유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건너온 것이다. 결국 나는 자유의 나라로 미국을 선택한 우를 범했고 이것은 나의 여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고 개탄했다.
유대인의 족보
전 세계 유대인의 수는 오늘날 1600만 명으로 추산되다. 이스라엘에는 600만 명이, 다른 나라들에는 1000만 명이 산다. 유대인들의 세계분산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한다. 오늘날 이 말은 유대인들처럼 어떤 특정장소를 준거로 결집된 것은 아니더라도, 강한 정서적 민족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현상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대인은 나치 인종주의의 희생자가 되었지만 유대인 내부에도 피부색에 따른 차별이 만만치 않다. 이스라엘의 600만 명 인구 가운데 솔로몬의 후예로 불리는 에티오피아 출신 유대인(Falasha)은 10만5000명인데 이들은 빈곤과 백인유대인들의 차별대우로 고통받고 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유대종교를 믿는 건 아니다. 정통파 유대종교인들은 이스라엘의 유대인 중 약 6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머리에 ‘키파(kippa)’라고 하는 빵모자를 쓰는 종교적 유대인이 30퍼센트이며, 나머지 64퍼센트는 유대교에 전혀 관심이 없는 세속인들이다. 언론은 유대종교인들의 이중적인 도덕성을 폭로하는 기사를 자주 실을 정도로 종교이놔 세속인 사이의 관계는 좋지 않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탈무드]는 정통파 유대종교인들만 배울 뿐 세속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유대인들이 가장 성공으르 거둔 나라는 단연 미국이다. 유대인은 2000년 기준으로 미국 인구 2억 8000만 명의 2.2퍼센트에 해당하는 600만 명에 불과하지만, 아시아계 950만 명에 비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의 실세로 군림한 신보수주의자들의 실력자들이 대부분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의 1인당 소득은 비유대인의 2배에 달하고 미국 최고부자 40명 중 16명이 유대인이다. 또 뉴욕과 워싱턴의 일류 로펌에서 일하는 변호사들의 40퍼센트가 유대인이다. 유대인 소유의 언론사는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50여 개로 전체의 3퍼센트, 언론인은 전체의 6퍼센트에 불과하나 대도시와 영향력 있는 매체와 자리에 집중되어 있다. 할리우드는 유대인이 창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유대주의의 정치학
아렌트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나치즘이 유대인들을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이자 유대인을 ‘위협’으로 간주했던 이유 중 하나는 유대인이 ‘민족이 없는 사람들’이며, 민족적 세계에서도 무민족적 구성요소라는 점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컨대 유대인에게 민족은 없다. 유대인은 여타 다른 이방인들과 같은 그런 이방인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독일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도 자기들의 본거지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인에게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은 일시적 상태라기보다는 일종의 본질이다…’민족이 없는 상태’ 덕분에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다. 민족이 구원의 토대이며 민족을 매개로 하여 회복과 재생이 일어난 이래로, 유대인들의 ‘무민족적 위상’은 이를 테면 내부에서 민족을 통한 구원을 위협하게 된다”
[시카고 트리뷴]이 그 유명한 오보 [듀이, 트루먼을 물리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낼 정도로 막판까지 듀이의 우세가 확연해 보였지만 결과는 트루먼의 승리로 나타났다.
“The Buck Stops Here”
원자폭탄 투하 결정에서부터 한국전쟁 참전에 이르기까지, 트루먼만큼 재임기간 중 매우 중요한 결정을 많이 내려야 했던 대통령은 없었다. 이와 관련해 트루먼은 “모든 책임은 내가 잔다”라는 말을 백악관 집무실 책상 위 팻말에 새겨두고 좌우명으로 삼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말의 유래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포커 게임에서 공정하게 딜러의 순번을 결정하기 위해 사용한 ‘사슴뿔 칼(buckhom knife)’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가장 일반적이다.
머로의 방송 중 가장 유명한 방송으로 평가받는 1940년 9월 12일의 방송
‘여기는 런던, 오전 3시 30분입니다. 오늘은 ‘일상적인 밤’이라 불릴 수 있는데 9시경에 공습경보가 있었고 그 이후 간헐적인 폭격이 있었습니다. 오늘밤은 전보다 더 많은 고성능폭탄이 터졌고 소이탄은 적었던 듯합니다. 단지 두 군데에 불길이 보입니다. 여전히 독일인들은 폭격기를 한 대나 두 대씩 보내고 있습니다. 대공포화는 치열했지만 20분간 런던이 조용할 때가 있습니다”
히치콕이 최초로 만든 할리우드 영화 1940년작 <해외특파원> Foreign Correspondent)
카메오(Cameo)와 더불어 히치콕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한 ‘맥거핀(MacGuffin)’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작품이다. 맥거핀이란 이 영화에서 사용된 별 의미 없는 암호명으로, 영화줄거리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을 마치 대단한 것처럼 위장하여 관객들을 속이는 일종의 속임수장치다.
1950년 미국 영화산업의 수익 중 40퍼센트가 국외로부터 거둬들인 것이며 1960년에 이 수치는 무려 53%에 달했다.
194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FBI에게 할리우드 동향을 정기적으로 보고하는 비밀첩보원이기도 했던 월트 디즈니
킨제이는 젊은 남자들에 비해서 불과 5분의 1 정도밖에 안되는 성충동을 가진 나이 든 여자들이 억압적 형태의 성교육을 가르치고 비행청소년 반대운동을 지휘한다는 잔인한 아이러니에 특히 주목했다.
“사회가 성을 금지하려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군대와 감옥도 그런 금지를 강요하는 데 실패했는데 하물며 시민사회에서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어떤 경우든 킨제이는 섹스가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님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성적 충동에 굴복하는 사람은 정신적 도덕적 부적응자라는 오래된 주장에 대해, 성적으로 가장 능동적인 사람들이 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들에 속한다는 통계자료로 응수했다. 사람마다 제한된 분량의 성 에너지가 있어서 함부로 그것을 써버리면 안 된다는 식의 ‘정자경제학’에 대한 19세기적 사고에 맞서서 킨제이는 성적 활력이 건강의 징표라고 단언했다.
북한의 평화통일 제의는 군사적 공격을 위한 명분 축적용이었던 반면, 이승만의 그런 주장과 아량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 이양
이승만은 7월 14일 맥아더에게 “한국군도 함께 지휘해주기 바란다”는 서한을 보냈다. 이승만은 신임 육군참모총장 정일권(당시 33세)을 불러 “귀관은 이후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를 받으라”고 구두로 명령했다. 16일 맥아더의 서신으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맥아더에게 이양되었으며 맥아더는 미8군 사령관에게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행사토록 했다.

작가강준만출판인물과사상사발매2010.07.05
미국사 산책 8. 미국인의 풍요와 고독
텔레비전의 한국전쟁 보도
CBS의 명기자 에드워드 머로(1908~1965)는 1950년 8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녹음 프로그램에서 “미군들이 퇴각할 때에 한국의 계곡과 마을을 휘젓고 다니면서 불을 지르면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고 논평하였지만, 이는 CBS간부들의 검열로 방송되지 못했다.
“그 늙은이는 아편전쟁이 끝났다는걸 모르는 모양이군”이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처칠을 ‘늙은이’라고 비아냥댔지만 처칠은 이승만보다 겨우 4개월 연상이었다.
훗날 로버트슨은 이승만에 대해 “교활하고 임기응변의 재주가 있는 장사꾼 기질에 더하여 그의 나라를 국가적 자살행위로 충분히 몰아넣을 수 있을 만큼 고도로 감정저기고 비합리적, 비논리적인 광신도”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아이젠하워는 휴전조약이 맺어지기 며칠 전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공산주의자들과 남한정부 둘 다 너무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이승만이 너무나 비협조적이었거나 고집을 부린 사례들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로 많다. …. 물론 공산주의자들이 적이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너무나 불만스러운 동맹자이며, 그를 아무리 심한 말로 비난해도 지나치지 않다”
… 정부는 조병옥을 육군형무소에 수감시켜 주사를 하면서 대통령 암살음모사건과 연계시키려고 들었다. 사실 이것이 바로 이승만식 반공주의의 가장 이상한 점이었다. 민주주의와 양립하기 어려운 반공주의라고나 할까.
전 인구의 10분의 1을 죽인 전쟁
20세기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민간인 희생비율이 높은 ‘더러운 전쟁’
그 잔인성에 있어서는 20세기의 국제전이나 내전 과정에서 발생한 다른 어떤 학살을 능가하였고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전쟁 백화점이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무참하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살아 있는 인권 박물관이자 교과서였다.
원산폭격
원산폭격은 세계 전사에 신기록을 세웠다. 미 해군 소장 스미스(1893~1977)의 증언에 따르면, “미 함정은 원산을 밤낮없이 폭격했다… 그것은 아마도 한 도시에 이루어진 함포공격이나 공중폭격으로는 역사상 최장시간일 것이다… 원산에서는 길거리를 걸어 다닐 수 없다. 24시간 내내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 수 없다. 잠은 죽음을 의미했다.”
공식 미 해군사에 따르면 그 공격은 861일간이나 계속되었고, 종전시간인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휴전 1분 전에야 끝이 났다. 동 기록에 의하면 원산은 그때 “완전 폐허가 되었으며 멀쩡한 건물은 한 채도 없었고, 공장들도 땅에 파묻혀 버렸다.”
신경질적인 미군은 어떤 한국인이든 쏴 죽을 태세였다. 그랬다. 1950~1953년은 한국인으로 태어날 때는 정녕 아니었다.
드라마틱한 거짓말은 무미건조한 진실보다 더 매력적인 것일까?
매카시 “이 손안에 있소이다(I have here in my hand)”
토끼사냥꾼
무슨 소리야 토끼가 분명히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니까! 그 토끼를 잡으려고 내 사냥개도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는데 뭘. 정 내 말을 못 믿겠다면 내가 그 나무를 보여줄게
매카시의 ‘반지성주의’
그 나무를 보여주면서 증거라고 주장하는 매카시의 수법은 늘 논리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카시의 수법을 ‘반지성주의’의 표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출애굽’ 이집트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해방되어 나온 일.
‘블랙 라이크 미’
아우라 ‘고유한 분위기’
실제로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를 과잉현실의 대표적인 예로 여겼다. 그는 미국 국민들이 디즈니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디즈니랜드는 환상이라기보다는 ‘실제적’이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디즈니랜드는 ‘실제의’나라, ‘실제의’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숨기기 휘아혀 거기 있다(마치 감옥이 사회 전체가 그 평범한 어디서고 감방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는 것과 약간은 유사하게). 디즈니랜드는 다른 세상을 사실이라고 믿게 하기 위하여 상상적 세계로 제시된다. 그런데 사실은 그곳을 감싸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전체와 미국도 더 이상 실재가 아니며 파생 실재와 시뮬라시옹 질서에 속한다”
사회주의자로서 쇼핑센터를 이웃들을 위한 모임장소로 구상했던 그루엔은 자신이 교회의 확장을 억제하고 자동차 양산을 억제할 제도를 설계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물론 전혀 잘못된 확신이었다. 쇼핑몰로 인해 교외로의 이전과 도심 공동화의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1960년에는 전 인구의 3분의 1이 교외 지역에 살게 되며, 그 비율은 점점 더 늘어난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결과에 질겁해서 서둘러 빈으로 돌아갔고 1980년 좌절한 채로 사망했다.
“우리는 여러분이 길을 잃기를 바랍니다” 미니애폴리스에 개장한 “몰 오브 아메리카”를 설꼐했던 디자이너가 개막식장에서 한 말이다.
그루엔 전이
그루엔의 원래 의도가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쇼핑 환경의 모든 것을 갖춘 쇼핑몰의 발명은 소매업자들로 하여금 방향 감각을 상식한 고객들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전례 없는 능력을 가지도록 했던 것이다. 일대일 강요 설득에서 혼란에 빠진 고객이 영업 사원에게 결정권을 떠넘기는 유도 퇴행과 권위 양도 현상이 벌어지는 것처럼 그루엔 전이는 쇼핑몰을 찾는 고객을 건물 내에서 방향을 잃고 길을 헤매는 어린아이처럼 만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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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를 읽는건지 세계사를 읽는건지... ㅎㅎ
암튼 황혼의 투쟁과 관련된 얘기가 나와서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불현듯..황혼의 투쟁이 하고 싶어지는....

작가강준만출판인물과사상사발매2010.09.06
아버지가 만든 아들
군 제대 후 한동안 기자로 활동하며 유엔총회, 포츠담회담 등을 취재한 케네디는 1946년 초여름 아버지가 막대한 돈을 뿌린 덕분에 보스턴의 연방 하원의원 민주당 후보가 될 수 있었다. 보스턴의 한 신문에 ‘국회의석 판매:경험은 필요없음, 지망자는 뉴욕에 살거나 플로리다에 거주해야 함, 오직 백만장자만 지원할 수 있음’이라는 케네디에 대한 야유성 광고가 실릴 정도였다.
케네디는 요양을 하며 1956년 [용기있는 사람들]을 발표했다. 이 책 또한 다른 사람들이 대신 써준 것이었다. 집안 친구인 아서 크록이 다시 나서서 [뉴욕타임스]와 매우 가까운 퓰리처상 위원회를 움직였다. 케네디의 책은 1958년 퓰리처상을 받는다. 그것참, 아버지는 잘 두고 볼 일이다.
케네디는 “내 일생에만 7명의 대통령 가운데 4명이 임기 중 일시적이라도 건강문제로 업무수행이 불가능한 적이 있었다”며 자신의 젊음을 건강과 연결하는 전술도 구사했다. 그러나 훗날 밝혀지지만, 그의 진짜 문제는 역대 그 어떤 노령의 대통령보다 더 나쁜 건강이었다.
존슨은 어떻게 러닝메이트가 되었나
케네디의 러닝메이트는 텍사스 출신의 민주당 원내총무 린든 존슨 이었다. 그는 191의 장신에 독특한 퍼스낼리티를 가진 인물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인물평을 종합해보자면 이런 사람이었다.
“용감하지만 잔인하며, 애정이 있는 반면 무자비하고, 지적 능력이 뛰어난 반면 센스가 전혀 없었다. 관대하지만 이기주의자였고, 친절하지만 무자비했으며, 세속적이지만 아주 매력적이었다. 충동적이고 잔인무도했고 노골적이고 센스가 없고 유머가 없고 보잘것없었지만 감정이 있고 수줍어하며 세련되고 자아비판적이고 재치와 아량이 있다.”
1961년 4월에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4월 12일, 소련이 스푸트니크 실험에서 얻은 자료를 토대로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Yurii Alekseevich Gagarin, 1934~1968)을 우주로 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총 1시간 48분 동안 우주비행을 한 가가린은 우주선에서 지구를 바라보면서 “우주는 캄캄하고 지구는 푸르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케네디가 피그스만 침공 사건 실패 이후 쿠바를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1961년 10월 쿠바침공을 계획했고, 11월에는 연간 5000만달러를 들여 400여 명의 CIA요원이 참여하는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을 승인했다. 동시에 카스트로 암살계획을 계속 추진했다. 케네디는 카스트로가 좋아하는 시가에 폭탄을 장착하는 음모 등을 포함해 CIA가 마피아와 짜고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는 계획도 승인했다. 1962년 3월엔 미국도 핵실험을 재개한다고 선언했다.
10월22일 저녁 7시, 케네디는 텔레비전 전국 방송을 통해 “소련이 쿠바에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타격할 수 있는 중거리미사일 기지들을 건설하고 있다”면서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조치를 취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소련에 미사일 기지 해체를 요구하면서 만약 쿠바에서 미사일이 날아온다면 미국은 이를 소련의 공격으로 간주하고, 소련에 보복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일종의 ‘치킨게임’이 시작되었다.
흐루쇼프는 훗날 회고록에서 “나는 가면무도회에서 방귀를 뀌었다고 해서 자살이나 하는 차르 시대의 장교가 아니다. 전쟁을 하는 것보다 후퇴하는 것이 나았다”고 말했다. 후퇴를 생각하지 않았던 카스트로는 이런 타협에 대해 욕을 퍼붓고 벽을 발로 차며 거울을 내던지면서 격분했다. 그러나 그는 10년 후 조지 맥거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흐루쇼프보다 더 강경노선을 취할 수도 있었다. 그가 타협했을 때는 격분했지만, 흐루쇼프가 노련했고 현명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가 케네디와 멋진 화해를 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나의 주장을 밀고 나갔다면 끔직한 전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나라의 집권자도 자신의 국가와 국민이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처할 경우, 상대방 국가의 입장에서는 비이성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 따라서 역사적인 맥락이 거세되고 미국의 위협이 강조되게 마련인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다른 모든 적대국가들은 비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무지몽매한 집단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쿠바 미사일 위기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케네디의 위대한 업적으로 알려지며 케네디 신화의 토대를 구성하고 있다.
“비즈니스 아트는 예술 다음에 오는 단계다. 나는 스스로 상업적 예술가이기를 주장했고 이제는 비즈니스, 즉 사업 예술가로서 끝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사업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가장 매력적인 종류의 예술이다…돈을 번다는 것은 예술이며 일한다는 것도 예술이며 훌륭한 사업은 최상의 예술인 것이다”
먼로의 죽음
1962년8월5일 메릴린 먼로가 자신의 자택에서 사체로 발견됐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전화 수화기를 붙납은 채 발견된 먼로의 죽음은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자연의 정복’이라는 말은 ‘모든 자연은 인간의 편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네안데르탈 시대의 생물학과 철학’으로부터 나온 오만불손한 말이다. 응용 곤충학자들이 지니고 있는 사고방식과 행동방식도 대부분 석기시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과학이 최신식의 가공할 무기로 무장하고 있으며, 그 총구가 곤충을 향해 그리고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를 향해 겨누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고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롬은 “우리의 양자택일 문제는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관료주의와 휴머니즘사이의 문제”라고 단언했다 과연 그럴까 그의 주장은 지나치게 근본주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관료주의와 휴머니즘이 과연 현실적인 양자택일의 문제인지에 대해선 선뜻 동의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진실을 인식하는 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성품의 문제”라는 그의 말을 상기한다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말하고 강조하는 그 굴레가 우리를 관료주의적 삶의 체제에 자구 묶어놓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케네디가 1947년 의원이 되었을 때부터 연설했던 내용을 읽어본다면 소렌센이 1953년 그의 진영에 합류하자마자 어떤 차이가 나타났는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오즈의 마법사]영화에서 흑백으로 보이던 장면이 갑자기 천연색으로 바뀌는 순간과 같다. 순식간에 케네디는 그의 목소리를 찾아낸 것이었다. 케네디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내자 놀랄 만큼 성공적으로 여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문과 가문의 이미지 마케팅’에만 몰두했을 뿐 제도적 개혁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비판도있지만, 그 어떤 비판이건 ‘케네디의 전설’을 뛰어넘긴 어려울 것이다. 전설은 ‘검증불가’라는 데에 그 본질이 있는 게 아니겠는가.
제1세계의 농간으로 제3세계가 생산해내는 원자재가격은 늘 가격 폭락의 위험을 안고 있었으며, 그 결과 장기적인 경제계획을 세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제1세계와의 무역에서 제1세계가 범하는 부당한 횡포에 시달리던 제3세계는 단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64년 유엔 무역개발회의에서 ‘77개국 그룹’을 조직했다.
디엔비엔푸전투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며,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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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알수록 모르는게 많아진다.

작가강준만출판인물과사상사발매2010.09.06
세계에서 미국의 잘못을 손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 이런 긍지는 북한의 축복이라기보다는 저주가 아닐까? 그런 긍지에 집착하고 그 긍지 하나로 버텨나가면서 인민을 굶겨 죽이는 본말전도를 달리 어찌 설명할 수 있으랴. 미국과 북한의 관계, 이는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본질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미국에 질세라 B747이 시험비행에 성공한 1969년 프랑스와 영국이 합작 투자한 콩코드 비행기가 탄생했지만, 생산비가 많이 들고 마케팅이 시원치 않았다. 가망이 없는데도 계속 투자하다가 총 190억 달러를 쏟아부은 끝에 2003년 4월에서야 운행을 중지했다. 남은 건 ‘콩코드 효과’라는 말이었다. ‘매몰비용 효과’라고도 한다. 돈이나 노력, 시간 등이 일단 투입되면 그것을 지속하려는 강한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낭비를 싫어하고 또 낭비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으려는 동시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기 합리화 욕구 때문에 발생한다. 미국에 베트남전에 깊숙이 빨려 들어간 이유이기도 하다.
군내 유일한 의사인 헨리 지킨스 씨가 말했다. ‘이 많은 돈을 전부 달에 가는데 써버리는 동안, 이곳에서 저는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갈비뼈가 다 드러나고 배가 불룩해진 아이들을요’
비틀스 히트곡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LSD 상징(마약)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둘러싼 모든 논란의 핵심은 이른바 ‘저항의 상품화’에 관한 것이다. 이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다. 보다 많은 사람을 끌어 들이기 위한 대중화를 위해서는 상품화가 불가피하지만, 상품화는 본말전도를 초래하는 위험을 수반한다. 그러면 어떡하면 좋을까? 답이 없다. 사안별 질적 분석이 유일한 대안이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으면서도 단지 그 상황을 설명해주는 것만으로 큰 위안을 줄 수 있다. 토플러는 바로 그런 역할을 맡은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 어느 정도의 부작용은 불가피한 것이고 이것은 언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주에서 경험을 통해 체득한 언론 자유의 이치는 일부 썩은 가지들을 마구 쳐 없애는 것보다는 나무 전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보호하여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과 같다’
‘최근 정부의 행정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부정과 부패의 가능성은 더 늘어났고 범죄도 크게 증가했다. 범죄집단과 부정을 일삼는 무책임한 관리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민주 사회의 첨병인 용감한 언론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해졌다. 일부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언론인들에 의해 언론의 자유가 남용된다고 해서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언론이 사전억제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원칙의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박정희 정권은 큰 위기의식을 느껴 미 행정부와 의회를 대상으로 하는 로비를 벌였다. 그러나 어제와 내일 없이 오늘만 생각하는 외교 솜씨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었겠는가.
반면 맥거번의 선거 참모들은 상대적으로 용의주도하지 못했다. ‘맥거번이 <스타트랙>때문에 졌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있다. 홧김에 닉슨에게 표를 던졌다는 어느 유권자의 주장에서 나온 이야기다. 러셀 뉴먼에 따르면 ‘맥거번의 선거 참모들은 <스타트랙>이라는 유명한 텔레비전 드라마의 시간대를 사서 그 시간에 정치 광고를 대대적으로 방송했다. 그러자 시청자들은 <스타트랙>의 시간대가 옮겨진 데에 격분했고, 당시 유일한 대안이었던 닉슨에게 표를 던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화려한 불행’이라 했고,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위엄 있는 노예생활’이라고 했다. 작가 존 스타인벡은 ‘우리는 대통령에게 도저히 한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일과, 도저히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책임과 도저히 한 사람이 견뎌낼 수 없는 압박을 주고 있다”
칠레-잉카어의 한 갈래인 아이마라어로 ‘대지가 끝나는 곳’이른 뜻

작가강준만출판인물과사상사발매2010.11.08
<별들의 전쟁>은 액션영화의 주류를 서부극에서 SF로 바꿔놓았다. 이 영화의 기획자 케리 커츠는 “SF의 세계에는 서부극의 인디언처럼 아무리 죽여도 상관없는 우주인이 있다”고 말했다.
래시 “예전에는 광고가 단지 제품에 대한 관심을 환기했으며 그 제품의 장점을 칭찬했다. 오늘날의 광고는 그 자신의 제품을 만들어낸다. 그건 바로 늘 불만족스럽고 안절부절 못하며 불안해하고 지루해하는 소비자다. 광고는 제품을 선전한다기보다는 생활양식으로서의 소비를 촉진한다. 광고는 대중을 ‘교육’시켜 상품뿐 아니라 새로운 경험과 개인적인 충족을 위한 수그러들지 않는 욕구를 느끼게 한다. 광고는 고독, 고통, 황량함, 성적 만족의 결여 따위와 같은 해묵은 불만에 대한 대안으로서 소비를 제시한다. 그와 동시에 광고는 현대에 독특한 새로운 형태의 불만을 만들어낸다. 광고는 유혹적으로 산업문명의 불안을 이용하는 것이다. 당신의 직업이 따분하고 무의미한가? 당신의 직업은 당신에게 무력감과 피로감을 안겨주는가? 당신의 인생은 공허한가? 소비는 그 고통스러운 공백을 메꾸어준다고 약속한다. 상품을 로망스의 후광으로 감싸고자 하는 시도, 이국적인 장소와 생생한 경험에 대한 언급, 모든 축복이 비롯되는 여성의 가슴과 관련된 이미지로 말이다”
래시는 광고라고 하는 상품 프로파간다가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고 한다.
“첫째 기능은 소비를 반항과 폭동의 대안으로 가능케 하는 것이다. … 지친 노동자는 노동 조건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로 주변을 밝게 꾸미는 데에 관심을 갖는다. 두 번째로 소비의 프로파간다는 소외 그 자체를 상품으로 변화시킨다. 현대 생활의 정신적 황량함을 지적하고 소비를 그 치료제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 프로파간다는 모든 해묵은 불행을 치료한다고 약속할 뿐 아니라 개인적 불안정, 지위에 대한 불안감, 자식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능력에 대한 부모들의 불안감 따위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불행을 만들어내거나 악화하는 것이다. …….광고는 시기와 그에 따르는 불안감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카터 연설의 핵심
‘자유를 정말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으로 생각해야 한다. 즉 그것이 소유와 눈에 띄는 소비가 아닌 다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자유를 지속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자력이 허용하는 한에서 삶을 꾸리기 시작해야 한다.’
‘20세기 초 이래 영국이 건설해온 비대한 복지국가를 해체하고 경쟁 사회를 부활시키자는 것’ 쉽게 말해 대처리즘은 ‘탈복지국가’ 이데올로기였다.
광주사태를 기록해놓은 미 국방부의 비밀문서들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밀 분류에서 해제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정보공개법에 따라 특정 시기, 특정 사건, 특정 부처 문서의 비밀 해제를 요청할 경우에도 광주사태 문건들은 여전히 엄밀한 비밀 해제 작업을 거쳐 검정 띠로 여기저기가 가려진 채 공개된다. 특히 광주사태 문건의 경우 펜타곤의 국방정보국(DIA)자료는 앞뒤 문맥을 이어나갈 수 없을 만큼 ‘떡칠’이 되어 나온다. 광주 현장에서 첩보활동을 했던 국방정보국 소속 보고자의 이름, 보고 날짜, 한국군 부대 이름은 물론, 국방정보국 내 접수처와 심지어 접수날짜 및 시간조차 가려져 있는 경우가 흔하다.
전두환의 방미 교섭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12월 19일, 박정희 시절 핵개발을 주도했던 원자력연구소와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이 갑자기 통폐합되었다. ‘원자력’이라는 말을 아예 빼버리고 ‘에너지 연구소’라는 새 이름을 달았다. 이는 1980년 초 1차 숙청에 이어 1982년 12월 31일에 단행된 사상 최대 규모의 국방과학자 숙청(과학자와 연구소 직원 839명 해고)과 함께 큰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정진석(1999)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이 추진했던 자주국방 계획과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전두환 정권의 출발을 용인했는지도 모른다.”
김대중 구명은 혹 이를 위장하려는 카드는 아니었을까? 레이건 정권이 제3세계 민주화 지도자의 목숨 알기를 우습게 아는 정권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후일 전문가들은 국방과학자 대숙청은 한국 국방과학기술을 10년 이상 후퇴시켰으며 자주국방 의지를 실종케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움베르토 에코
“텔레비전을 시청했던 사람들은 행렬하는 말의 똥이 거무틱틱하지도 않았고 갈색이거나 불규칙하지도 않았으며, 늘 그리고 어디서나 베이지색과 노란색 중간의 아주 빛나는 파스텔 색조이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으면서 여성복의 부드러운 색과 조화를 이루도록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손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왕실의 말들은 일주일간 똥이 텔레비전 카메라에 잘 받는 색깔을 띠도록 특수알약을 먹였음을 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떤 것도 우연에 맡겨져서는 안 되었으며 모든 것은 중계방송이 지배했다. “
굳이 양자택일을 하라면 앵커의 ‘우상화’가 이뤄지는 미국 시스템보다는 뉴스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는 한국 시스템이 더 나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뉴스를 무조건 믿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한국인들의 왕성한 회의력은 불신사회를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불신이야말로 건강한 민주주의의 동력이 아닐까?
1982년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는 1981년 이래로 미국의 빈민층은 그간 받아오던 연방정부보조금 가운데 100억달러 이상을 박탈당해왔는데, 그 돈은 66만 1000명의 어린아이들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고 지적하며 레이거노믹스의 잔혹성을 통렬히 비난했다.
미국의 그레나다 침략
베이루트 사건 이틀 뒤인 1983년 10월 25일 미국은 1만여명의 해병대와 공수특전단을 앞세워 인구 11만에 불과한 카리브해의조그마한 섬나라 그레나다를 침략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그레나다 내에 있는 미국인 1000여 명을 쿠바의 위협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정당방위라고 주장

작가강준만출판인물과사상사발매2010.11.08
인도 보팔 가스 참사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도 반미주의의 확산에 일조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인도 보팔 가스 참사다. 1984년 12월 3일 새벽 인도 중부 보팔 시의 한 농약 공장에서 가스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공장은 미국의 화학그룹인 유니언 카바이드의 농약 제조시설이었다. 1866년에 설립된 유니언 카바이드는 [포춘]이 선정한 1984년 전미 500대 제조업체 가운데 매출액 순위로 35위(95억달러), 화학산업에서는 국내 3위, 세계 7위에 속하는 다국적 기업이었다. 소니와 합작으로 만든 건전지 에버레디.
선거자금에 관한 한 대기업을 그 주요 기반으로 삼고 있는 공화당이 늘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텔레비전은 지지계층 및 구성원이 공화당에 비해 훨씬 이질적이고 다양한 집단으로 이뤄진 민주당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주장도 대두. 즉 텔레비전은 메시지의 세분화를 어렵게 하기 때문에 각 집단 간의 상충된 이해 조정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대처와의 정상회담이 서방국가들을 겨냥한 레이건의 대외 이미지 메이킹 작업이었다면,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과의 2차 정상회담은 제3세계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의미심장한 제스처였다. 즉 미국은 군사독재 여부에 관계없이 우익정권을 선호하며, 경제발전을 원하는 제3세계국가들은 친미정책을 일사불란하게 구사해온 한국의 성공사례에서 그 어떤 교휸을 얻으라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싶었던 것이다.
1985년 6월 미국 국적의 TWA(trans world airlines) 여객기가 아테네에서 시아파(shia Islam)이슬람교도에게 납치되어 레바논의 베이루트 공항에 강제 착륙해 39명의 미국인이 2주이상 인질로 잡히는 사건이 벌어졌다. 7월 베이루트 인질사건이 끝나 인질이 풀려난 직후 레이건은 측근에게 “여보게, 지난밤에 <람보 2>를 보았어. 이제 나는 그런 일이 또 발생할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았지”라고 말했다나?
스토크먼에 의하면 레이건은 경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경제의 음치”이며, 세금을 엄청나게 낮추고 국방비는 엄청나게 늘리면서도 적자를 줄이겠다는 망상을 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레이건은 부하로부터 설명을 들을 때 ‘그 개념이나 내용보다는 지극히 지엽적인 일화 따위에만 관심을 보일 뿐”이라고 말하고 “다른 방법이 하나도 없는데도 증세를 반대한 것은 고집스럽고 무식하며 무책임한 행동으로 20세기 미국 재정 역사상 이보다 심한 바보짓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란-콘트라 스캔들의 놀라운 점은 레이건의 게으르고 유유자적한 태도가 그를 곤경에 몰아넣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식으로 정치를 해왔으면서도 지난 6년간 그토록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제3세계 내의 모든 분쟁이 종식된다면 미국 내의 파산기업은 엄청난 규모에 이를 것이며, 미국은 신무기를 실험할 장소도 잃게 되는 터라, 미국이 세계 평화를 위해 해쓰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군사산업경제 구조의 이득이 미국인 모두에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군사케인즈주의’로 불린 레이건의 군비증강정책은 일부 자본집약적 고도기술에만 재미를 보게 했을 뿐, 미 연방정부 적자폭을 악화시켜 그 부담을 빈민층을 포함한 전 미국인에게 전가했으며 군국주의 문화의 위험마저 몰고 왔다.
왜 미국 국민들이 그토록 어리석은 대통령을 좋아할 만큼 어리석을까-이 의문은 후세의 역사가들만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의문은 부분적으로나마 당장 풀 수도 있다. 세상은 원래 무질서하고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일수록 대통령이라는 직책 또는 제도에 큰 의미를 부여하게 마련이다. 전 세계 다른 국가에 비해 놀라운 부와 풍요를 누려온 미국의 상류층과 중산층들이 제3세계의 목소리가 드높게 일고 있는 국제관계를 두려운 시선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러한 국제관계에서 미국의 패권을 영속화하겠다는 레이건의 팍스 아메리카나가 꽤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레이건은 위대해야만 한다’는 그들의 당위가 ‘레이건은 위대하다’는 환상으로 발전되었으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살인은 불법이지만 그것을 촬영해 언론에 실으면 퓰리처상을 받는다. 섹스는 합법인데 촬영해 잡지에 실으면 왜 감옥에 가야 하는가?” 래리 플린트.
1989년 3월 24일 미국 최대의 정유회사인 엑슨의 유조선 발데스호가 알래스카 근처에서 암초에 부딪혀 좌초함으로써 원유 1100만 갤런이 유출되는 환경재앙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1100마일에 이르는 알래스카 해안이 오염되었으며, 3만6000여 마리의 철새와 1000여마리의 물개가 떼죽음을 당했다. 전 인류가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큰 사건이었지만, 이 사건을 뒷전으로 밀어낸 정치적 격변이 유럽과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
1989년 4월 2일 [뉴욕타임스]는 미, 소 간의 적대감정이 종식되었다며 냉전이 끝났음을 선언했는데, 이런 선언을 현실로 구체화하는데에 기여한 주인공은 고르바초프였다. 그는 1989년 2월 15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완전 철수했으며, 2월 23일 동유럽과 소련 간의 역사적인 관계를 재검토한다고 발표함으로써 동유럽 여러 곳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을 철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본의 아니게 중국의 천안문 사태의 발전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89년 4월 한때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했고 정치개혁에 동조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후야오방이 사망하자, 베이징의 학생 지도부는 그의 죽음을 기리는 대규모 학생시위를 천안문광장에서 벌이기로 했다. 5월 16일 천안문 광장에선 대학생 30여만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전날에는 단식시위를 하던 대학생 100여명이 쓰러졌다. 학생들은 부패청산, 연고 임용제 폐지, 삶의 질 향상, 민주주의로의 이행 등을 요구했다. 때마침 중국을 국빈 방문 중이던 고르바초프를 취재하기 위해 몰려든 외국 기자들 덕에 이 시위는 전 세계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걸프전쟁
스마트폭탄과 크루즈 미사일은 2300년 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정복에 이용했던 ‘신무기’인 장창과 이동식 쇠뇌(여러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쏘는 활)에 비유되었다. 이런 첨단 과학기술은 나중에 21세기의 미래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불러일으켜 이른바 ‘네트전쟁’과 ‘사이버전쟁’에 대한 전망으로까지 나아간다.
미국의 고르바초프 정권 지지는 소련 보수파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그 결과 1991년 8월 19일 새벽, 소비에트 쿠데타가 일어났고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고르바초프를 흑해연안의 별장에 감금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개혁파의 핵심 인물인 옐친을 체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옐친은 모스크바에서 쿠데타 세력에 맞서 탱크 위에 올라서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강력 대처함으로써 쿠데타를 실패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옐친은 러시아 영토 안에서 공산당을 금지하는 결단마저 내렸다. 고르바초프는 3일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왔지만, 연방정부의권위는 추락했다. 고르바초프는 연방의 역할을 어느정도 지키기 위해 여러가지 방식으로 투쟁했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1991년 12월 8일 소련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소련을 구성하던 15개 공화국 가운데 14개 공화국이 소련으로부터 탈퇴했고, 터줏대감인 러시아가 구소련을 계승한 것이다. 국토는 소련의 76퍼센트, 인구는 50%, 경제력은 45퍼센트, 병력은 33퍼센트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젠 독립국이 된 14개 공화국을 인구 규모 순서로 살펴보면
우크라이나 5071만, 우즈베키스탄 2322만, 카자흐스탄 1647만, 벨로루시 1029만, 아제르바이잔 758만, 타지키스탄 592만, 조지아 541만, 투르크메니스탄 549만, 키르기즈스탄 457만, 몰도바 432만, 아르메니아 377만, 리투아니아 370만, 라트비아 249만, 에스토니아 146만

작가강준만출판인물과사상사발매2010.12.31
미국사 산책 13. 미국은 '1당 민주주의'국가인가?
일레인 김은 “LA에 사는 한국계 미국인은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위기 시마다 저항의 원천이 되었던 민족의식에 기대는 도리밖에 없었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서로 소통하고 돕기 위해 한국어 신문과 라디오에 의지했으며, 생계수단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 들고 함께 모였다. 4.29가 일어난 지 사흘째 되던 날 3만 명이 넘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평화행진을 위해 LA시내에 모였다. 이것은 아마도 아시아계 미국인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신속하게 조직된 집회였을 것이다. 상복 색깔인 흰 옷을 입은 악사들이 슬픔과 분노 속에서 전통 한국 악기인 북을 두들기면서 한인들의 결속을 축하했으며, 그 자리에 모임 사람들은 그 북소리에 한마음이 되어갔다. 나는 문화 민족주의는 한국계 미국인들에게 해가 된다고 비판해왔다. 그 이유는 민족주의가 한국 여성을 억압하고 사고의 경직성과 통일성을 강요하며 자기비판을 억제하고 자살에 이르기까지 하는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4.29는 나의 사고에 전환을 가져왔다. 혼자 남겨진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만약 한국계 미국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권고를 거절하면서 미국에서 희생자나 정치적 볼모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우리가 선택할 무기는 무엇인가?”
클린턴은 기자회견을 8년에 44번 한 레이건보다는 많게, 그러나 4년에 279번 한 부시보다는 적게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티는 독립 이후 34번의 쿠데타를 겪는 정치혼란 속에 두 차례 허리케인이 강타해 각각 1600명과 3000명이 죽는 연속적인 대재앙에 시달렸다. 2008년에도 한 달 만에 4차례의 허리케인으로 아이티 국토 전역을 폐허로 변했다. 산림의 98퍼센트가 남벌되고, 지표층이 쓸려 나간 환경파괴로 인해 더욱 악화된 결과였다. 곡물가가 세계적으로 급득한 식량위기가 더해져, 아이티 주민들은 대통령궁에 난입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게다가 2010년 1월 최악의 지진이 발생해 아이티는 지옥으로 변하고 만다.
1994년 6월 어느 날 클린턴 대통령은 재래식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고 북간의 핵무기 보유를 저지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그에 따라 군부는 세 가지 방법론을 제시했고 클린턴 대통령이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불과 한 시간 전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에 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북한이 영변 원자로의 폐연료봉 재처리를 중단하고 미국과 협상하겠다는 것이었다. 1시간 차이로 역사가 바뀌었다.
“묻지 말라, 말하지 말라, 추궁하지 말라(Don’t ask, don’t tell, don’t pursue)”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평화로운 중간 지대를 찾으려는 ‘제3의 길’ 방식을 아주 잘 표현한 구호였다”는 평가도 있다.
승자독식사회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도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기리라" 신약성서 마태복음 25장 29절
'마태효과'
승자독식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인지도 모른다. 번식기에 수많은 수컷 중 오직 4퍼센트의 수컷만이 출산된 새끼 중 90퍼센트나 되는 새끼의 아비가 된다. 거의모든 동물이 그렇다. 인간은 그렇지 않지만 사회 내의 승자를 선출하고 그 승자들에게 번영과 영광을 독식케 하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경쟁과 탐욕을 예찬하는 이들은 승자독식이 그것들을 부추기는 동력이 돼 사회발전에 기여한다고 믿는다.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 이면도 보아야 할 게 아닌가. 날로 심각해지는 빈부격차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작가강준만출판인물과사상사발매2010.12.31
세계화 시대의 ‘팍스 아메리카나’
어떤 문명도 그 스스로 단일화돼 있지 않다. 수니파의 이라크와 시아파의 이란은 신학을 위해 다투는 것이 아니라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싸운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회교도들은 예지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지가 아니라 토지와 자원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즉 문명들 사이의 알력은 세상사의 다른 요인들에 비해 2차, 3차적인 것들이다. 국가들은 전과 마찬가지로 마찬가지로 현재도 국가 이익에 토대를 두고 협력하거나 충돌할 수 있다. 상호의존의 심화와 기술의 발전은 점점 더 문명이라는 경계선을 뒤어넘어 협력하는 것을 가능케 하고 유용하게 만들고 있다. 문명은 진화한다. 헌팅턴이 서구적 방식의 토대로 파악한 신교도의 개인주의와 거리가 먼 포르투갈, 스페인, 일본과 다른 국가들에서 최근 수십 년간 민주적 가치가 꽃피어났다. 우리는 ‘서구와 나머지 문명’사이에 해소할 수 없는 갈등이 있다고 가정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는 잠재적 갈등요인들을 상호 이익이 되도록 바꾸어야만 한다
예전에 문화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사람들이 문화적인 것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돈이 예술적 감수성을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문화부라는 부처의 존재 자체가 우스운 것이다. 국가의 문화에 대한 개입은 유적의 관리 정도로 충분한 것이 아닐까. 도대체 문화를 관리하는 부처라니, 한국에도 몇 년 전에 문화부가 생긴 것은 다른 나라의 나쁜 관례를 따온 것 같다.
어플루엔자
고통스럽고 전염성이 있으며 사회적으로 전파되는 병으로,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태도에서 비롯하는 과중한 업무, 빚, 근심, 낭비 등의 증상을 수반한다.
잃어버린 3년 8개월, IMF 환란
세계화란 본질적으로 경제의 금융화다. 금융은 정부의 통제 밖에 있다. 그래서 국제적 환투기가 벌어져도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이게 바로 1997년 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외채로 인한 대환란의 실체였다. 금융 위기는 1997년 여름 태국을 강타한 데 이어 홍콩을 거쳐 그해 늦가을 한국에 상륙했다. 외환위기에 봉착한 나라들은 국제통화기금에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IMF환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클린턴 “지금 나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과연 한국인들에게 옳은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그들(한국)에게 실업자를 양산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물론, 외국인들이 한국 기업을 사들이도록 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그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사실, 미국에서조차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자본주의적 관행이 아닌가? 이것이 발전인가? 이게 우리가 지금 바라는 건가? 이것이 과연 IMF가 원하는 상황이란 말인가.”
마이클 조던
그의 은퇴 소식이 전해진 후 나이키의 주가가 5.3퍼센트 떨어졌다는 사실에서 그가 기업에 미쳤던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였던 것이다.
타이타닉
| 승선자 | 생존자(생존율) | 실종자(실종율) |
1 등실 | 329 | 199(60.5%) | 130(39.5%) |
2 등실 | 285 | 119(41.8%) | 166(58.2%) |
3 등실 | 710 | 174(24.5%) | 536(75.5%) |
승무원 | 899 | 214(23.8%) | 685(76.2%) |
합계 | 2223 | 706(31.8%) | 1517(68.2%) |
비아그라(Vigra)=’활력(Vigor)”+’나이아가라(Niagara)’
르윈스키는 1997년 6월 대통령에게 전한 쪽지에 “나는 폐기처분될 것이고, 이미 사용이 끝났고,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고 쓰기도 했다.
“나는 글을 쓰고 또 다음으면서, 수치를 모르는 클린턴의 성품이 정치적 성공의 열쇠이며, 부인하는 능력이 바로 그의 가장 탁월한 정치적 강점인 낙관주의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교묘하게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나약함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과 그들의 재능을 개발하기도 했다.”
“벤추라의 당선과 계속되는 그의 인기는 논쟁을 일으키고 적을 만들려는 인간의 본능과 관계된다. 알다시피 ‘갈등’은 또 하나의 인간의 보편성이다. 그리고 벤추라는 확실히 그런 갈등을 유발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본능에 어필했던 것이다”
대중이 기존 정치를 욕한다고 해서 그들이 변화를 염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오늘날의 대중에게 정치는 ‘오락’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로 무대를 넓힌 전쟁”
코소보전쟁은 미국의 확실한 전력우위를 드라마틱하게 입증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미국과 유럽의 연합 군사작전으로 이뤄졌지만, 유럽은 들러리만 섰을 뿐이었고 거의 모든 것을 미국이 도맡아 했다. 미국이 출격 임무의 대부분을 담당했고 세르비아와 코소보에 투하된 정밀 유도 폭탄 역시 거의 미국제였다. 첨단기술을 활용한 정보 수집 능력도 비교할 바가 못 돼 폭격 목표의 99퍼센트가 미국 정보에 의존한 것이었다. 유럽에서 제법 군사력이 강하다고 자부하던 영국조아도 출격한 항공기의 4퍼센트, 투하된 폭탄의 4퍼센트만 기여했을 뿐이다.
먼 곳도 아니고 바로 자기들 동네 유럽에서 그랬으니, 이 전쟁으로 인해 “유럽의 체면이 다소 충격적인 정도로 구겨지고 말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소는 가축들 중에서 음식물의 에너지 전환이 가장 비효율적이라고 한다. 1파운드의 고기를 얻기 위해 9파운드의 사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70%가 가축 사육을 위해 소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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